KANG TAE HWAN Solo Exhibition 


자기-장소, 지금-여기 

내가 이끌었어. 이 길로.


I led you this way


2024. 11. 29 - 2025. 01. 12 

제주국제평화센터 기획전시실

반딧불이, 별, 그리고 빛


이나연 평론가


 지독히 사랑하는 제주풍경 하나는 시간과 공간이 특정적이다. 이 풍경은 제주의 곶자왈에서 6월 한 달에만 볼 수 있다. 한 달의 제한된 기간 중에도 아주 깜깜하고 습한 조건이 동반되어야만 반딧불이가 불을 켜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반딧불이가 사는 곶자왈, 습하고 깜깜한 청정의 제주 숲 사이에서 인공빛이 최소화되고 인기척이 없을 때, 빛을 밝히고 비행을 시작하는 현란한 반딧불이의 난무를 볼 수 있다. 귀하고 신기 하고 숭고한 장관이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반딧불이 비행하거나 잎사귀에 앉아 쉬면, 까만 숲이 환상적으로 변한다. 작은 빛이 만들어 내는 공간, 자연 속 숲과 생물이 만들어 내는 한 계절 한 찰나의 광경은 강태환의 작업을 볼 때마다 플래시백 된다. 어두운 배경에 점들이 빛을 발하는 시각적 유사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은 빛이 신기하리만치 아름다운 숭고의 감정을 끌어내는 감정적 유사함 때문이기도 하다.


 강태환이 수직의 선과 공기를 바탕화면 삼아 가로로 놓여 떠 있게 만들어 내는 빛의 이미지는 일종의 착시 효과에 기댄 가짜 이미지다. 광섬 유에 금을 내어 빛이 빠져나간 점들이 모인 창백한 빛의 덩어리일 뿐이다. 이 빛의 덩어리는 어떤 선이나 흐름 같은 추상적인 형상으로 읽히 기도 하고, 의자나 건축물처럼 구체적인 구상 이미지로 떠오르기도 한다. 전통적인 펜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철골이나 목조, 혹은 흙으로 깍거나 주조하지 않았으나, 어떤 시각적 형상은 전기가 온오프 됨에 따라 사라졌다 등장한다. 배경이 어둡고 밝음에 따라 진해졌다 흐려졌다 한다. 그 빛을 자연에 빗댄다면 반딧불이가 적합하다. 반딧불이가 스스로 불을 밝히고 어둠 속을 나는 것처럼 강태환이 자연의 이미 지를 그려낸 자연스러운 선들을 작가는 빛드로잉이라 칭한다. 전통적 기법인 드로잉의 선을 빛으로 구현해 낸다는 점에서 그렇게 칭하지만, 강태환의 점들은 스트링에 새겨져 있어서 평면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드로잉이라기보다는 물리적 조각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조각은 스위치의 온오프에 따라 이미지가 온오프 된다. 전기가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소멸과 생성을 반복한다. 아니다. 완벽한 소멸은 아니다. 


 스크린과 모니터의 영상은 전기가 없으면 볼 수 없다. 그 이미지는 가상의 데이터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강태환의 광섬유 조각은 물리적 흔적을 가진다. 하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전체적인 형상을 볼 수 없거나 아주 어렵다.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사실은 보여주려고 만든 것 이자, 전기가 들어와야만 완벽히 잘 보이는 특이한 방식의 조각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디지털 아트와는 다른 물리적 조각과 가상현실의 경계 지점에 놓인 특수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듯하다, 전통적 조각과 회화도 결국 조명이 있어야 형태가 완벽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어쩌면 이들도 빛의 보조 없이는 시각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긴 하지만, 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한 작품인 반면, 강태환의 조각은 어둠에선 불완전한 작품이다. 댄 플래빈과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빛이 없으면 무용지물인 것과 유사하다. 불완전한 작품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인 표현 같다면 조명을 작품에 내재한 조각이라 생각해 봐도 좋겠다.


 빛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고, 조각이라는 작업 방식에 집중해 작품을 보면 입체적 점묘법, 공간 점묘법, 디지털 점묘법이라는 다양한 용어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용어가 단순히 빛을 점으로 바꿔 조형성을 획득한 어떤 장르처럼 쓰일 수도 있지만, 밤하늘의 별이 패턴을 가지면 별자 리가 되고, 그 별자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처럼, 강태환의 작업에서 이 점은 시작점이자 마무리인 중요한 요소다. 조형 언어의 기본 단위인 점들이 이어지며 선을 만들고, 그 선이 모이면 면이 만들어지는데, 이 면이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다. 평면의 세계가 아니라 입체의 세계는 자연에 좀 더 가까운 연출을 가능하게 한다.


 쉽게 말하느라 우회했지만, 결국 강태환은 광섬유를 이용해 반딧불과 별이 만들어 내는 빛의 점을 찍어 자연과 아주 유사한 예술 작품, 짧은 말로 유사-자연을 연출한다. 올라퍼 엘리아슨이 테이트의 터빈홀을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는 어떤 기후로 만든 것처럼, 강태환은 화이트큐브 안으로 반딧불과 별을 끌어들였다. 이 유사자연의 공간을 작가는 헤테로토피아로 정의한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일반적 으로 양립 불가능한, 대척점에 놓인 여러 공간을 동일한 장소에 중첩하는데 그 구성 원리가 있고, 서로 다른 공간의 같은 장소 안의 합치는 단순히 서로 다른 공간의 기능적 공통성, 지역적 근처를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서로 다른 공간적 배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시간성을 포함한다.” 인공적인 공간 안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두 가지 서로 다른 공간이 변증법적으로 공존하는 상태를 만들어 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헤테로토피아는 미셀 푸코가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푸코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헤테로토피아는 언제나 그것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외부 세계에 닫혀 있지 않고 전면적으로 열려있는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누구라도 거기 들어갈 수 있지만, 사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그것은 환상일 뿐, 어디에도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감하게 된다.” 역시 열림과 닫힘이 공존하는 변증법적 발상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자연 안에 지은 건축물 안에 가상으로 만드는 허구의 산물인 예술 작품은 굳이 플라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연의 모방이다. 그 모방은 실상 모든 것의 모방에 해당하는데, 예를 들어 절대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해 낸 마음속 어떤 것, 추상적인 어떤 심상만을 끌어내겠다던 추상화 가들도 결국은 신이 만든 인간의 마음을 모방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뿐이다. 무소불위의 자연 앞에서 예술은 창조와 창작의 이름으로 어떤 극복을 시도하지만,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같은 세상이란 말 같다. 결국 그 자연에 순응하는 동시에 극복하는 의지를 내포하는 변증법적 예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자연에서 제공하는 것에 견줄만한 숭고의 감정까지 만들어 내는 미적 성취를 이뤄낸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강태환의 작품은 분명히 강력한 감정적 동요를 끌어낸다. 그게 요즘 말하는 디지털 숭고일 수도 있고, 유사-자연이 주는 자연의 경이를 대체 하는 유사-경이감일 수도 있다. 어떤 단어를 택하든, 나는 강태환의 작품 앞에 서면 반드시 반딧불의 숲에서 느낀 벅찬 감정을 도돌이표가 붙은 듯 되돌아 생각하고, 고도가 높은 이국의 밤하늘에서 본 떨어져 내릴 듯 아름다웠던 별 무리를 떠올린다. 늘 그 작품 앞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감정적이고 시각적인 시간여행을 하고 나서는,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퍽 만족하고 만다. 쉽지 않은 일인 까닭이다.


<내가 이끌었어, 이 길로.>에서는 그동안 현실 속에서 이상을 찾으며 이를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으로 해석해왔던 작업을 확장하여 공간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탐구하였다. 작품의 시작인 자연적 공간은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 삶의 공간으로 도시와는 물리적 거리가 주는 단절감 덕분에 마치 현실 속의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는 장소 특정성을 가진다. 동시에 접근이 어려운 곳은 아니기에 현실과 이상이 교차하는 독특한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의 삶, 공간에서 경험하고 체험한 자연의 모습, 자연과 인공이 하나로 융합된 특수한 공간, 이러한 제주의 장소 성을 배경으로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을 넘나드는 상반된 공간을 연출하여 관람객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관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유사-자연 가변설치(10m), Mixed media, 2024


 공적 공간에 설치된 한국적 건축 형태의 대형 설치 작품은 사회 속 개인의 역할과 관계를 상기시킨다. 익숙한 공공 이미지가 재해석된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구조와 공적 관계 속에 서의 자신을 직시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 공적공간은 사회적 환경과 이상적 유토피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관람객이 사회 속의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공간에 설치된 빛 혹은 빛을 조형화한 작품은 그 자체로 보여지는 사물성의 본질에 관심을 두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작품, 공간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작가는 시간과 체험을 통한 장소적인 측면에서 지금-여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느낌을 제시한다. 현대미술에서 본격적으로 빛을 공간에서 오브제로 사용한 미니멀리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을 공간과 사물로 언명하면서 물질성과 비물질성, 체험 등의 특성에 중점을 두었다. 미니멀리스트는 실제 공간에 실제 사물을 놓아두었을 뿐이며, 이러한 공간에서 관람자가 작품에 직접 개입되어 연극성과 현존성을 보여준다.

나는 공간의 틈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학을 담았다. 루이스 칸(Louis Kahn)이나 안도 다다오(Ando Tadao)가 건축물에서 빛과 그림자를 통해 공간을 재구성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루이스 칸과 안도 다다오는 자연광을 활용하여 공간에 변화를 주었다면, 나의 작품은 가변적인 설치를 통해 빛 자체를 물질로 사용하여 빛의 움직임과 형태를 표현하였다.

‘빛을 통해 공간을 새롭게 정의한다.’ 


 빛의 선들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특정한 형태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하는데,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물리적인 틈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제주의 곶자왈에서 발견한 “비움과 채움”에 영감을 받아‘공간의 틈’에 집중하게 되었다. 


 나는 유년 시절에 사찰과 숲을 자주 찾았으며 그 안에서 사색과 명상, 자연의 모습과 소리 등 자연을 신체적으로 자주 체험했다. 자연은 지구와 우주의 물리적 세계를 구성 하는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 요소가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는 내가 바라보고 느낀 자연의 범주를 확대해 풀, 나무, 숲, 바다를 넘어 도시화에 따른 인공적인 배경까 지도 자연에 포함했다. 자연에서 접하는 커다란 산이나 숲, 도시에서 볼 수 있는, 흔히 말하는 도시 숲, 건설 현장 등이 동시대적 자연현상이라 작가는 말한다. 이를 통해 설치된 작품은 자연에서 경험하고 기억된 이미지를 공간에 들이는 설치 방식으로 유사 자연을 형상화하였다. 그래서 나에게 빛은 “자연에서 온 순수한 소재”이자 “인류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의 소재”까지 포함한다. 빛의 광섬유로 만들어진 공간은 처음에는 경이롭고 숭고하게 느껴지지만, 그 본질이 인공적이고 기술적임을 깨닫게 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진정한 자연의 숭고함과 기술적 재현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게 되며, 유사 숭고의 개념을 경험한다. 인공적인 것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연스 러운 것을 최대한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유사 자연’은 나의 예술적 실험이 집약된 표현이다. 유사 자연은 단순히 물리적 요소들로 이루어 낸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무형적인 요소도 포함한다.

내가 경험하였던 자연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마치 스쳐 지나가거나 다가올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처럼, 이는 단순히 숲과 바다. 땅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빽빽한 건물이 들어선 도심, 인공의 정원(구중궁궐의 정원, 페르시안 정원)과 같은 인공적 현상 또한 숲과 바다처럼 동시대의, 내가 바라보는 또 다른 자연스러운 자연 이다. 거대한 규모의 건축적 작품이나 외부자연을 공간 안으로 들이는 유사 자연은 인공적 자연을 연출하는 재현된 자연으로 현실 속에 나타나는 유토피아를 통해 자연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유사 자연으로부터 전해지는 숭고의 체험은 지금-여기, 장소로서의 전시 공간은 헤테 로토피아적 성향을 지닌다. 안개가 자욱한 어느 곳에서 자연의 빛이 쏟아지는 것과 같이 그 빛은 공간에 존재하며 비물질성인 듯 물질성인 듯 애매한 모습으로 공간의 모든 요소를 덮고 부유하는 매체로 존재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 자연의 내부 침잠이다. 자연이 그렇듯 작품은 공간과 상황, 흐름에 맞추어 다채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ready-made #01, 700×500×2800㎜, Mixed media, 2024

ready-made #02, 700×500×2800㎜, Mixed media, 2024



“나는 손이나 자동적인 기제로 통제할 수 있는 빛-기구(light-apparatus)를 꿈꾸었다. 

허공에, 큰 방에, 색다른 특성(unusual nature)을 가진 스크린, 안개, 연기, 구름에 빛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빛의 기구를 ··· 

그리고 빛 건축 ··· 전원을 켜면 눈부신 빛으로 가득차고 빛의 교향곡으로 넘실거릴 수 있는 그런 건축, 

그리고 이와 함께 표면은 서서히 변해가면서 조정되는 수많은 세부 면들로 녹아드는 건축을 만들고 싶다.” 


- Richard Kostelanetz(ed.)

공간에 배치된 스탠드 오브제는 집과 같은 개인적 안식처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관람객이 개인적 사유와 명상을 통해 내면을 탐구하도록 유도한다. 일상의 사적 영역을 형상화한 이 공간은 관람객이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이상과 명상적 관조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이 사적공간에서 관람객은 외부의 사회적 기대나 관계로부터 벗어나 오직 자신만의 내면 에서 유토피아적 이상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ready-made #03 550×350×1800㎜, Mixed media, 2024

ready-made #04 550×350×1800㎜, Mixed media, 2024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ready-made #06 300×300×600㎜, Mixed media, 2024



작품을 통해 장소특정성과 장소가 내재하고 있는 고유한 시공간을 제시하는데, 이로 인해 관람자의 관람 방식에 따라 작품은 각자 다르게 해석된다. 

 즉, 작품 관람 위치에 따라 변화되는 신체의 감각은 관람자로 하여금 현재성만이 아닌 관람 주체의 기억을 바탕으로 과거-현재-미래로의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한다.

KANG TAE HWAN Solo Exhibition 


Garden


 

제주문화예술진흥원 제2전시실




자연을 빼닮은 유사자연, 

순간의 찰나이지만 뇌리에 강하게 남는 유사숭고 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설치함으로써 

낯선 공간을 낯익은 공간으로 재창조 하였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느끼는 것이, 

우리가 인공이라고 느끼는 것이 동시대적으로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으며 

그런 모호함의 특징은 현재까지 전개된 작가의 작품 경향을 비롯하여 

현실속의 유토피아인 헤테로토피아적 숭고를 체험하게 한다.


빛은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이다. 다양한 양상으로 체험되는 빛은 감성적 표현을 보여준다. 공간의 내부에 뿌려진 빛은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신비로운, 혹은 아우라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앞선 작품에서는 기억과 공간, 시간을 빛의 비물질성으로 매개하고 전시공간은 빛의 물질성으로 작품을 치환했다.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는 20세기 전반 새로운 매체인 사진과 기계 등을 작품에 활용한 작가로 빛을 사용한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다. 그는 예술가와 관람자의 시각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기에 전통적인 미술전시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새로운 지각의 경험을 제시하기 위해 비물질인 빛에 주목하였다.




“나는 손이나 자동적인 기제로 통제할 수 있는 빛-기구(light-apparatus)를 꿈꾸었다. 

허공에, 큰 방에, 색다른 특성(unusual nature)을 가진 스크린, 안개, 연기, 구름에 빛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빛의 기구를 ··· 그리고 빛 건축 ··· 

전원을 켜면 눈부신 빛으로 가득차고 빛의 교향곡으로 넘실거릴 수 있는 그런 건축, 

그리고 이와 함께 표면은 서서히 변해가면서 조정되는 수많은 세부 면들로 녹아드는 건축을 만들고 싶다.” 


모홀리-나기 텍스트 중




그는 현존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공간과 물질, 시간의 상호관계에서 발생하는 존재의 지각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빛이 주는 경험을 통해 인간의 지각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후 빛은 작품에서 부차적 요소에서 중심요소로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전환은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한 주목을 받는 미니멀리즘에서 시작되었다.



Monad_#00105 50호, mixed media, 2021

KANG TAE HWAN Solo Exhibition 


지금 이 순간,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n Sublime


지금 이 순간, 헤테로토피아


우현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약속 장소까지 걸리는 최단 거리, 시간, 방법을 핸드폰 앱으로 점검한 뒤 집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지하철 출구는 ‘없는 장소’이다. 그들에게 그곳은 전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지나쳐야 하는 통로일 뿐이며, 몇 번 출구라고 쓰인 표지판은 머릿속에 자동입력하는 이미지 정보에 해당한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크 오제(- Marc Augé)의 말을 빌리자면 이곳은 비장소(Non-Place)의 전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소가 없는 곳’이 아니라 ‘전통적인(인간적인) 자소가 아닌 곳’에 해당한다. 사람보다 텍스트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가 중심이 되는 비장소의 특징 역시 지하철 출구를 떠올리게 한다. 통로를 지나는 현재의 시간보다 지하철을 타는 미래의 시간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 지하철 출입구에 대한 특정한 인상이랄 게 있을까?


강태환의 <지금 이 순간, 헤테로토피아>는 지하철 입구의 설치된 유리 골조 구조물에 광섬유를 수직으로 늘어뜨리고, 그 안에 빛 드로잉을 시도하는 공공미술 작품이다. 작품이 설치된 장소가 신체의 이동성을 전제로 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대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로 인해 작품 형태의 변주가 지속되고, 그에 따라 감각의 층위도 달라진다.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공간에서 멈춰 서게 하는 것, 그 찰나의 순간 일상을 일탈로 만들어주는 경험을 일으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지하철역을 나서는 이들은 출구를 향해 위를 바라보는 순간 작품과 만난다. 내가 작품과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으로 인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현실로 자각할 수 있게 되며 ‘지하철 탑승자’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진 익명의 존재에서 벗어난다. 이처럼 1번 출구, 2번 출구라는 추상적인 공간이 구체적인 현실성을 지닌 장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경험 또는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1960년대 유토피아의 이상을 투영하면서도 대항하는 공간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했다.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달리 실재하는 현실의 공간이지만 일상 공간과는 구분되는 이질적인 공간으로서 사회 질서의 바깥에 위치한다. 모든 인간 사회는 헤테로토피아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 시간대를 간직한 복수의 헤테로토피아는 무덤이나 박물관과 같은 장소에서는 영속적인 시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헤테로토피아를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간 개념으로 접근함으로써 지하철 출입구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은 비밀과 판타지가 숨어있는 헤테로토피아로 전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은 사적이고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숭고’에 해당한다. 통상 인간이 거대한 자연을 대면하며 느끼는 외경감을 표현하기 위한 미학적 논의의 대상이지만 감각보다는 정신 또는 내적 자아의 일깨움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을 해석하는 이론적 프레임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에게 숭고는 인간이 예술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단계로서 이상적인 어떤 상태를 지칭한다. 이 작품이 비장소, 헤테로토피아, 숭고라는 거대한 개념을 지지대로 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개념들은 방법론에 가깝다. 작품의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지하철 출입구로 돌아가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주목해야만 한다. 공공미술은 그것의 접근성 또는 관람자의 수 때문에 공적인 것 아니라 그것이 묻거나 해결하기로 선택한 질문들 때문에 공적이라는 페트리샤 필립스(Patricia Phillips)의 주장처럼 미술관을 벗어난 빛 드로잉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말을 하고 있을 터이다.

지금 이 순간, 헤테로토피아 - 가변설치, mixed media, 2020

<지금 이 순간, 헤테로토피아>는 지하철 입출구에 설치된 작품으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장소는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비장소로 시간성, 즉 찰나의 순간을 주목하고 있다. 작품 제작에 있어서 우선은 장소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였다. 일상에 있어 중요한 교통의 거점으로 이 장소는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들과 작가, 작품이 소통 가능한 일상의 장소로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공공의 특수성에 대해 고민하였다. 지하철 공간이 내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소란스러움에 대해 심리적으로 상쇄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 장소를 오고 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는 정적 관조를 유도할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하였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처럼 작품만을 위한, 작품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고, 무엇보다 시민들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면 안 되는 장소이다. 그래서 작품 설치에 관한 설계를 진행하면서 현장 답사를 통해 공간에서 메인 통로를 지나 밑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드, 계단 옆의 좌우 공간을 선택하였다. 좌우 공간은 커다란 기둥과 기둥에 지하철역 이동 지표가 부착되어 시민들이 기둥 사이를 지나다니지 않고 이정표를 보며 지나가는 곳이다. 작품이 설치된 장소는 미래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신체를 전제로 하며, 그 시간성은 이동하는 시민들마다 각자 다르기 때문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지각 또한 다르게 느껴지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스쳐 지나는 장소에서 지표를 확인하다가, 혹은 의식적으로 작품과 마주하여 존재를 깨닫게 되는 순간 인식된 작품의 아우라로 인해 잠시 멈춰 서게 하는 것,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일상에서의 일탈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적이지만 단편적이지 않은 정적 공간을 제시하였다. 


지금 이 순간 찰나의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지각과 상상력으로 가득하게 되는 숭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숭고는 보통 인간이 존재하는 장소에서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는 순간 느껴지는 경외감을 표현하기 위한 미학적 논의의 대상이다. 이는 인간의 기억 혹은 정신 내적의 자아와 연관된 감각 이론의 틀로서 현대미술을 해석하는 주체의 판단이다. 현대미술에 있어 숭고는 인간이 예술을 접할 때 얻을 수 있는 상위 단계로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어떠한 상태를 일컫는다. 비장소에 설치된 이 작품은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성과 숭고라는 인간의 감각을 통한 거대한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방법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관람객과 상호작용이 되기 위해서는 평소 지나쳐가는 이 장소에 잠시 멈추어 서거나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는 관람자의 이행이 요구된다.


지금 이 순간, 헤테로토피아 - 가변설치, mixed media, 2020


 공적 공간에 설치된 한국적 건축 형태의 대형 설치 작품은 사회 속 개인의 역할과 관계를 상기시킨다. 익숙한 공공 이미지가 재해석된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구조와 공적 관계 속에 서의 자신을 직시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 공적공간은 사회적 환경과 이상적 유토피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관람객이 사회 속의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공간에 설치된 빛 혹은 빛을 조형화한 작품은 그 자체로 보여지는 사물성의 본질에 관심을 두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작품, 공간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작가는 시간과 체험을 통한 장소적인 측면에서 지금-여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느낌을 제시한다. 현대미술에서 본격적으로 빛을 공간에서 오브제로 사용한 미니멀리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을 공간과 사물로 언명하면서 물질성과 비물질성, 체험 등의 특성에 중점을 두었다. 미니멀리스트는 실제 공간에 실제 사물을 놓아두었을 뿐이며, 이러한 공간에서 관람자가 작품에 직접 개입되어 연극성과 현존성을 보여준다.

빛은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이다. 다양한 양상으로 체험되는 빛은 감성적 표현을 보여준다. 공간의 내부에 뿌려진 빛은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신비로운, 혹은 아우라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앞선 작품에서 연구자는 기억과 공간, 시간을 빛의 비물질성으로 매개하고 전시공간은 빛의 물질성으로 작품을 치환했다. 


작품을 통해 장소특정성과 장소가 내재하고 있는 고유한 시공간을 제시하는데, 이로 인해 관람자의 관람 방식에 따라 작품은 각자 다르게 해석된다. 즉, 작품 관람 위치에 따라 변화되는 신체의 감각은 관람자로 하여금 현재성만이 아닌 관람 주체의 기억을 바탕으로 과거-현재-미래로의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한다. 연구자의 작품에서 보이는 광섬유의 배치는 연속성과 자기복제적인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다. 2cm 간격의 프레임에서 수천, 수만 개의 광섬유를 일정한 형태로 배치하여 공간에 수직적으로 늘어뜨리는데, 이렇게 공간에 수놓아진 투명한 라인들은 라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매스감을 가진다. 광원장치를 통해 섬유에서 발하는 빛은 작품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며, 끝없이 반사되는 빛은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심리적인 경계까지 형성한다.


투명한 매스 안에 구현된 빛드로잉은 공간을 나누는 해체적 드로잉으로, 주변의 사물과 공간이 차지하고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작가적 의지를 내포한다. 광섬유로 구현된 빛드로잉은 나의 기억과 경험의 조형적 설치의 표현으로 자연 공간에서 보고 느낀 현상을 공간에 구현한다. 작품은 분명 장소 특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물리적인 현상의 구체적 재현이나 묘사를 배제하고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있어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자연의 이미지를 그려낸 자연스러운 선들은 나의 감각을 그대로 담아낸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관계 속 결과물이다. 따라서, 빛드로잉의 조형적 형태는 나의 기억을 추상적인 삼차원 입체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광섬유 사이사이의 간극은 시간의 개념이 확장된 공간적 개념으로 보이도록 했다. 일정하게 배치된 매체 사이의 공간은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시각적으로 작품의 이미지가 변하게 함으로써, 처음 마주한 이미지의 기억과 현재 이미지의 체험이 중첩되면서 중립적인 새로운 공간을 유도한다.

KANG TAE HWAN Solo Exhibition 


<gaps drawing - 空間>



2018 

제 1갤러리 라이브러리 존, 켄싱턴 호텔(E-land)

< 틈: 감추거나 드러내거나 > 


큐레이터 강 세 움 


작가에게 작업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익숙함을 넘어서고 싶은 새로운 갈망과도 같다. 그 갈망은 자신과 작품에 대한 끊임 없 는 싸움으로, 머리를 싸잡고 고민해야 하는 고통이 따르지만 말이다. 물질과의 싸움이냐, 표현과의 싸움이냐, 개념과의 싸움이 냐를 다투며 작가들은 오늘도 혈투를 벌이고 있다. 


어느덧 8년동안 끊임없이 작업을 해온 강태환 작가에게도 이 싸움은 계속 되었고, 지금이 가장 과열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제주에서 활동을 하는 작가이기 전에,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자연은 그저 일상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상의 일부분으로 들어간 그의 초기 작품으로는 나무와 나무 사이, 돌과 돌 사이, 또 다른 전망 등 자연 속에서 보이는 '틈(gap)'을 무형의 존재(추상)로 표현해왔다. 그리고 현재, 무형 이였던 틈의 존재는 구체적인 존재(구상)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기법의 드로잉이 아닌 조각작업으로 공간을 드로잉 한다. 드로잉의 재료 또한 연필이나 펜이 아 닌, 실이나 광섬유라는 물질로 틈새를 드로잉 하거나, 스테인리스를 이용한 반사효과로 자연의 틈을 담아낸다. 작업의 흐름은 어느덧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줄타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형존재로서의 틈을 찾기 위한 집착이 추 상에서 구상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틈은 하나의 개체로서 물질성으로 띄게 되었고, 세분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작가의 의식대로 드러난 틈은 계산된 분해, 분해되었지만 완전체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여기서의 분해는 독립성을 가진 분해가 아닌, 독립할 수 없는 연약한 분해로 해석 하고자 한다. 이는 여유 부릴 틈보다 기회 의 틈까지 노려야 되고, 벌어져 나간 사이를 매 순간 메우며 빈틈 없이 살아 가고 있는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하다. 정갈하게 정비된 자신은 완전체처럼 보이는 소속에서 위안받으며 살고 있지만, 개체로서는 공허하고 연약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소속.. 틈이라는 것은 틈이 있다 없다를 의식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형태일 수도 있고 아닐 수 도 있다. 그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틈으로 무의식의 틈을 찾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어쩌면 모든 관계는 유형무형의 불투명한 경계가 그 틈을 결정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장 마크 발레 영화의 한 메시지로 틈의 여지를 전하고 싶다. 




 감추어도 괜찮다. 드러내도 괜찮다. 뒤죽박죽이여도 괜찮다.


 “Life, Some Disassembly Required.” 

삶, 가끔은 분해가 필요하다.



 

공감하고 분해한 삶의 틈 그리고 위로


켄싱턴 제주호텔 갤러리 큐레이터 김민희 


틈을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도 가지지 못하고 명확한 형태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공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생각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런 틈이 있어야만 무언가를 행할만한 기회가 발생한다. 강태환 작가는 바로 이 ‘틈(gap)’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작가는 ‘곶자왈’이란 자연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하며 ‘틈’ 즉 ‘숨 쉬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조형적으로 풀어 내고 있다. ‘숨 쉬는 공간’이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감추어도 괜찮다. 드러내도 괜찮다. 뒤죽박죽이어도 괜찮다’고. 사실 현대인의 삶에서 괜찮은 것은 없었다. 경쟁사회에서 자신을 알리고자 자기PR과 이미지 메이킹은 필수불가결한 행동인 것이다. 자신의 속내는 드러내지 않고 항상 가면을 쓰고 상대를 대하고 정리된 모습으로 남들에게 자신을 내세운다. 즉 항상 긴장하고 상대방에게 맞춰진 자신을 보여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은 ‘숨 쉬는 공간’이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답답한 생활이 이어진 덕분에 최근 ‘YOLO(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 혹은 ‘소확행’(실현 가능한 행복, 혹은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경향들이 현대인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이젠 모두가 ‘틈’이 필요 해진 시점인 것이다.


강태환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가 ‘삶, 가끔은 분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뭉쳐진 삶을 하나하나 분리하고 생겨난 그 틈을 ‘Gaps Drawing’ 작품을 통하여 생각해보자. 작가는 광섬유의 일부분에서 빛을 내도록 작업하는데 이는 우리의 삶과도 같은 것으로 ‘사건의 발생 시점’을 뜻 할 수 있다. 살아가며 긍정 혹은 부정적인 일을 겪고 성장하게 되어있는 사람의 인생 나이테인 셈이다. 각자의 다른 인생 나이테를 한군데 모아두면 어떤 작품으로 탄생하게 될지 생각을 잠시 열어둔다. 그리고 물러서서 전체로 그려진 그림을 본다. 이런 생각의 ‘틈’을 선물해준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쏟아지는 별빛 같은 혹은 어두운 숲을 날고 있는 반딧불이 같은 모습, 삶의 고비를 넘고 있는 각자 삶의 모습, 모두 작품 안에 불빛으로 표현되어 오늘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해가진 어두운 저녁에는 더욱 밝은 빛을 낼 것이며 낮에도 계속 밝은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 할 것이다. 변함없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감상하게 되면 아름다움에 환호를 보내고 깊이 감상하면 슬퍼지려 한다면 작가가 보낸 ‘틈’ 아니 ‘숨 쉬는 공간’을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과 자연 혹은 다른 무언가와의 같이 살아감에 대한 감상을 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gaps drawing - 空間 가변설치, mixed media, 2018

gaps drawing 空間, 1500x350x2500mm, 2018

gaps drawing 5min_video, 2019

gaps drawing - 空間 가변설치, mixed media, 2019

거대한 투명 매스 안에 광섬유의 일부분에서 빛을 내도록 작업을 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도 같은 것으로 사건의 발생 시점을 말하고 있다. 살아가며 긍정 혹은 부정적인 일을 겪고 성장하게 되어있는 사람의 인생 나이테인 것 같다. 각자의 다른 인생 나이테를 한군데 모아두면 어떤 작품으로 탄생하게 될지 생각을 잠시 열어둔다. 그리고 물러서서 전체로 그려진 그림을 바라본다. 이런 생각의 틈은 서로에게 감사의 마을을 전달하게 되지 않을까. 때로는 쏟아지는 햇빛, 별빛같은 혹은 해뜨기 전, 곶자왈의 숲을 유영하는 반딧불 같은 모습, 삶의 고비를 넘고 있는 각자 삶의 모습, 모두 작품 안에 불빛으로 표현되어 오늘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해가 진 어두운 저녁에도 더욱 밝은 빛을 낼 것이며 낮에도 계속 밝은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할 것이다. 변함없이,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은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 경향을 강조했다.




경험과 기억에서 온 나무숲의 이미지를 조형화하여 유사자연의 형태로 작품을 설치하였다. 빛드로잉의 구현과 광섬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공간 전체로 확장된 설치 공간을 만들었다. 테크놀로지적 작품 설치는 물질과 비물질의 융합을 통해 숭고의 순간을 제시하는데 관람자는 이 장소에서 두 가지의 시점으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첫 번째는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형태로 닿을 듯 닿지 않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수직적 관람법, 두 번째는 2층 공간의 테라스에서 작품의 정면을 바라보는 수평적 방식으로, 투명한 매스와 빛의 중첩으로 선험적인 것을 넘어 경험적인 측면으로 지금-여기의 존재를 의식하는 체험을 제시한다. 이처럼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관람자의 지각은 다양하게 변화된다.

gaps drawing - 空間 가변설치, mixed media, 2017

사실 주변의 급변하는 모습을 여러가지 감정을 주고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자연의 모습들, 숲과 바다, 풀 등이 정말 자연의 모습이라면 동시대의 도시화 되어가는 인공적인 배경 역시 자연적 현상(숲도 자연이고, 건물도 자연이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사라지며 다시 탄생하고 이러한 반복들 속에 주체는 주체성과 자기를 반영하면서 자연과 문화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리얼리티를 구축하고 있다. 공간 안에 빛을 들임으로써 관람자들에게 대자연의 숭고를 지각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작가는 ‘유사자연'과 ‘유사숭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 2017. 작가노트 중


<비움공간> 


<비움공간>에서 광섬유의 수직성은 설치가 시작된 지점인 광활하고 장대한 숲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름 새벽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을 거닐며 나무숲 사이에서 뻗어 나오는 빛을 바라보면서 숲을 거닐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보다 오래 걸었다는 느낌에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게 된다. 은은한 바람이 지나고 있고 촉촉하게 젖어 있는 이끼들과 흙에서 느껴지는 촉각, 부채질하던 손은 숲 속을 향유하는 이에게 자연의 냄새를 가득 전달해준다. 숲에서 느낀 기억과 경험을 작품으로 구현하였다. 3개의 프레임으로 나뉘어 놓은 작품은 사람이 부채질을 하는 손동작의 잔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 이미지를 빛드로잉으로 형상화 하였다. 틈 사이로 은은하게 지나다니는 빛과 바람, 그리고 물을 인공의 요소를 통해 내가 기억하고 경험한 자연 공간의 이미지를 전시 공간에 들였다.

비움공간 가변설치, mixed media,2018

유영공간 가변설치, mixed media, 2018

KANG TAE HWAN Solo Exhibition 


<Gaps Drawing – 休>


 

레인보우 큐브 갤러리


강태환 Gaps Drawing – 休


김송희


  ㈜애월국제문화복합단지는 4.3 70주년을 맞아 제주도의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기획 전시를 선보인다. 강태환 작가는 제주의 바람과 곶자왈의 돌에서 영감을 받은 입체조형 작업으로 관람객이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한 감상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보여준다. 


 강태환 작가의 작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바람이 통하는 공간, 틈이다. 얼핏 보았을 때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광섬유의 선과 빛 사이의 빈 공간에 주목하여 무형적인 공간에서 유형의 형상, 즉 자연을 말하고자 했다. 제주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디에나 바람의 길이 있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인 포구에도, 밭과 밭의 경계를 짓는 돌담에도 틈이 있고, 용암이 흘러 바위덩어리가 쪼개진 사이로 나무가 자라난 곶자왈에도 바위틈으로 숨을 쉬는 숨골이 있다. 바람의 섬 제주는 어디에나 틈이 있었고, 이 틈 사이로 삶이 피어났다. 


 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강태환 작가가 선택한 것을 광섬유라는 소재로 표현한 공간 드로잉이다. 보통의 드로잉은 펜이나 연필 선으로 이루어진 작업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가는 광섬유를 하나의 선으로 사용하여 공간에 설치하고 그 선들이 이루는 공간 사이의 틈을 Gaps Drawing이라고 표현하였다. 광섬유 사이의 공기, 바람, 공간이 작가의 드로잉 재료인 것이다. 무형의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강태환 작가는 이 공간에 광섬유와 곶자왈의 돌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틈을 가시적인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틈을 보여줌으로 인해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삶의 틈에 대한 반추를 이끌어낸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고 변형하여 삶을 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끌어 올리는 기술을 강조하며 개개인의 삶이 하나의 작품, 예술이 되는 것을 존재의 미학이라고 했다. 강태환 작가의 틈은 관람객이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삶을 가져올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는 물질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빼곡히 세워지고 있는 높은 건물과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과 매연. 우리네 삶도 그렇다. 시간의 틈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일상으로 빽빽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과잉의 시대에 한번쯤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틈에 자신의 삶을 놓고 진정한 휴식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

gaps drawing ‒ 休 가변설치, mixed media, 2016

gaps drawing ‒ 休 가변설치, mixed medi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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